[뉴스1번지] YS 서거…"민주화 큰 별 졌다"

<출연 : 박태우 고려대연구교수·유용화 시사평론가·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오늘 새벽 서거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30년 여 년의 군정을 종식하고 처음으로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삶을 다시 조명해 보겠습니다.

박태우 고려대연구교수, 유용화 시사평론가,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과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질문 1>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른바 '서울의 봄'을 이끈 3김 시대를 이끈 주축이셨죠. 각자 기억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질문 2> 오늘 빈소에는 과거에 모시고 민주화운동을 같이했다는 서청원 의원과, 정치적 아들이라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또 3김 시대를 같이 했던 김종필 총재까지 그야말로 정치권의 조문의 발길이 이어졌는데요, 그만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굴한 정치인들이 많다고도 볼 수 있겠죠?

<질문 3> 지난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오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 가운데는 JP 김종필 전 총리만 남게 됐네요?

<질문 4>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화려한 이력만큼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보냈는데요,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 제명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었죠?

<질문 5> 김영삼 전 대통령, 1954년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만 25세의 나이에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요,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에 장택상의 국회의원 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고요?

<질문 6> 또 제3공화국 기간 동안 제1야당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거쳤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했는데, 1969년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당한 '초산 테러'는 당시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질문 7>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는 3김이 대권을 놓고 경쟁했지만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좌절되었고,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었는데요, 당시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 단식 투쟁을 한 건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지 않았습니까.

<질문 8>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직설적이고 저항적인 표현으로도 유명한데요, 이른바 YS 어록들, 어떤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지요.

<질문 9>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김대중, 김영삼, 이른바 '양김 시대'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이끌었던 두 분의 관계는 그야말로 동지와 라이벌이라는 애증의 관계였지 않습니까?

<질문 10> 김영삼-김대중 두 사람이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맞붙은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우리 정치사에서 흔치 않은 명승부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어떤 이유에서 그런가요?

<질문 11> 김영삼 전 대통령, 많은 우여곡절 끝에 문민정부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는데요. 문민정부만큼 공과가 극명하게 대립된 적도 었던 것 같아요?

<질문 12> 문민정부 집권 초기 대통령의 지지율이 90% 육박하기도 했었는데요, 이건 앞으로 깨기 힘든 수치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질문 13>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에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며 유신 체제에 강력하게 반대했었습니다. 김영삼 의원 제명 사건은 부마항쟁을 촉발해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발언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었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런 정치역정이 지금의 정치권에게도 던지는 화두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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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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